기사제목 [기획]광주항쟁에 대한 미국의 인식 전환과 어느 선교사의 5·18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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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광주항쟁에 대한 미국의 인식 전환과 어느 선교사의 5·18 기록

기사입력 2017.07.27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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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기념재단은 5·18의 진실을 규명하기 위한 작업의 일환으로 해외자료를 분석하여 발표하고 있다. 5·18기념재단 최용주 비상임연구원은 이번 보고서 외에도 지난 5월 「카터 행정부의 인권외교의 포기가 광주학살에 큰 영향을 미쳐」, 6월 「안보우선의 경로종속성 -1979~1980년 5월까지 미국의 대한(對韓)정책 분석」을 번역·분석하였다.

 

1. 5·18기념재단은 1980년 5·18 당시 광주에 거주하던 미국인 선교사가 작성한 5·18관련 일지를 발굴해서 번역 공개하였다.


2. 이 일지는 주한 미국대사 마크 리퍼트가 2017년 1월 18일 5·18기념재단에 기증한 5·18관련 기밀해제 문서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조사결과 미국정부가 1997년에 광주광역시에 제공한 기밀해제문서철에도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5·18광주민주화운동자료총서 제 9권 참조) + http://www.518archives.go.kr/books/ebook/9/#page=363 363~388쪽


3. 이 문서는 주한미국대사관이 입수하여 “광주소요에 대한 체류자의 설명(insider’s account of Kwangju Riot)이라는 제목으로 미국 국무부에 기밀전문으로 타전한 것으로 타전일자는 1980년 6월 10일로 되어 있으며, 일지의 제목은 ”5·18사태의 요약된 회고“ (Abbreviated Retrospect of the May Eighteenth Incident at Kwangju, Korea)로 적혀져있고, 일지의 작성일자는 1980년 6월 5-6일로 명시되어 있다. 작성자는 기밀이 해제되지 않아서 알 수 없다.


4. 흥미로운 점은 미국대사관이 자신들이 평가하던 “광주사태”와는 여러 가지 상반된 견해를 담고 있는 이 일지를 본국으로 타전하면서, “지금까지 우리가 본 보고서 중 가장 균형잡힌 광주사태 기록이자 분석”이라고 평가하고 신중하게 다루어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는 점이다.


5. 이 일지는 당시 상황을 일자별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면서 첫째, 5·18사태는 공수부태의 무자비한 폭력에 의해 발생했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으며, 둘째, 알려진 바에 달리 군인들이 물러간 광주에서는 시민들에 의한 폭동이나 폭력사태가 전혀 없고, 매우 질서정연하고 안정된 상태에 있었으며, 셋째 공산주의들이나 불순분자의 책동은 전혀 없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으며,


6. 광주시민들의 민주주의나 정치발전 등과 같은 거창한 구호보다는 잔인한 국가폭력 앞에서 하나로 뭉쳐서 자신들을 지켜낸 숭고한 인본주의적 공동체적 투쟁이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7. 이 일지는 특히 마지막 부분에서 5·18사태에 대한 자신의 평가를 5가지로 요약하고 있는 것이 인상적인데, 광주시민들의 높은 시민정신과 자제력, 공동체적 결속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8. 이 일지는 미국인 선교사라는 신뢰할만한 지위에 있는 인사가 작성한 최초의 영문 기록이면서, 미국대사관이 공식적인 논평을 달아서 카터행정부에 “공식적”으로 제출한 최초의 5·18기록이라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갖고 있으며,


9. 특히 당시의 대한(對韓)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하던 미국의 고위관료들이 가장 먼저 열람한 공식기록이라는 점에서 5·18이후 대한정책의 기류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런 점에서 역사적 가치가 매우 큰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10. 자세한 내용은 아래 보고서와 전문 번역문을 참고하기 바란다.


광주항쟁에 대한 미국의 인식 전환과 어느 선교사의 5·18 기록

 

목차

1. 광주항쟁에 대한 미국의 인식 전환

2. 어느 미국 선교사의 5·18 기록과 평가

3. 선교사 5·18일지 원문 번역

 

1. 광주항쟁에 대한 미국의 인식 전환

1980년 당시 미국은 광주항쟁의 정치사회적 성격을 어떻게 평가했을까? 이 질문은 미국과 전두환 신군부와의 관계, 광주항쟁 수습과정에 대한 미국의 개입, 그 이후의 미국의 대한정책, 나아가서는 1987년 6월항쟁의 민주화 이행과정에서 미국의 역할을 분석하는데 중요한 열쇠가 된다.


근본적으로 미국은 광주항쟁 당시의 한국을 시민사회가 아직은 미성숙 단계에 있고, 자유주의적 정치발전과 민주화를 이끌 “온건한” 성향의 중간계급이 없는 일종의 과도기 사회로 보았다. 박정희의 오랜 독재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이 높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 불만을 조직화하여 대항할 수 있는 대안적 정치세력은 부재하였고, 제도정치권의 야권은 분열되었으며, 극단적인 성향을 가진 학생운동과 소수의 재야세력들은 국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고 미국은 판단했다. 미국이 보기에 한국의 일반 국민들은 오히려 강력한 군부의 통치를 피할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강했다. 1979년 5월 25일자로 미국대사관이 작성하여 국무부로 보낸 정세보고서는 유신체제가 국민들의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고 평가하면서 아래와 같은 결론을 내리고 있다.


대다수 국민들은 정치분열을 극복할 전통적인 해결방식인 강력한 힘을 가진 행정부를 선호하고 있다. 행정부의 강권통치를 다 지지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반대파들은 여전히 소수이며, 대다수 국민들은 급격한 체제 개편의 위험성과 그에 따른 외부의 도발을 걱정하고 있다. (...)유신정권의 권위주의적 통제는 지나친 면이 있다. (…) 그럼에도 권위적 통제에 저항하는 내부 반발의 가능성은 거의 없다. 지금 한국상황에서 가장 시급한 문제는 경제문제와 외부의 도발가능성이며, 한국인들은 정치자유화보다는 안보와 경제적 복지를 우선시하고 있다.( Telegram from Gleysteen to Vance, Summit Background Paper 1, 1979.5.25.)

 

당시 미국대사 윌리암 글라이스틴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5·18 전후의 한국정세에 대한 자신의 평가를 아래와 같이 기술하고 있다.

군은 법과 질서, 사회기강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비교적 단결된 모습을 보이는 듯했다. 전부는 아니었지만, 많은 기업인들도 같은 견해를 피력하거나, 최소한 정치적 자유가 뒷걸음치는 것에 대해 큰 우려를 나타내지는 않았다. 더군다나 도시나 농촌지역을 막론하고 많은 국민들이 학생들의 과잉시위와 광주비극이 내포한 사회적 위험에 관한 주장에 동조하여 군인들에게 힘을 보탰다. 우리로서는 여론의 향배를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많은 국민들이 분노하고 있음에는 틀림없었지만, 새로운 권력자들에 도전하려는 사람은 없었다. 한국사회의 중도 온건계층은 사라지고 없었다. 글라이스틴, 알려지지 않은 역사, 1999, 205-206.

이어서 그는 이렇게 보충하고 있다.


우리의 영향력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결정적인 정보 부재와 우리가 그의 헌법상 권한을 지켜주기 위해 애쓴 최규하 대통령의 보수적이고 조심스러운 성격, 그리고 무엇보다 한국 국민들의 대대적인 저항이 없었다는 점이다. 학생과 반체제인사들, 그리고 광주의 분노한 시민들이 있었지만 한국 국민들은 대체적으로 혁명적인 분위기에 젖어 있지 않았다. (글라이스틴, 알려지지 않은 역사, 274.)

 

이러한 정세인식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최소한 미국의 시각에서는 광주항쟁과 같은 독재세력에 대한 집단적인 저항은 당시의 정치사회적 분위기에 비추어 비정상적인 과정으로서 점진전 정치발전에 도움이 되지 못하는 급진적 폭력사태에 다름이 아닌 것이다. 요컨대, “광주사태”는 독재정권과 국가폭력에 대한 “시민적” 저항이기 이전에, 국가의 안녕과 법질서를 해하고 결국은 북한의 위협이 상존하고 있는 남한의 안보체제를 위협하는 전라도 “이등시민”들의 집단폭동이라는 게 미국 행정부의 대체적인 평가였다.( Telegram from Gleysteen to SecState, “Kwangju Riot and Future Political Stability, 1980.5.21.)

 

이러한 평가는 결국 미국이 전두환 신군부의 무력진압에 대한 정치적, 도덕적 정당성을 직간접적으로 지지하거나, 최소한 방관하는 정책기조로 귀착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주항쟁 이후 미국의 이러한 초기인식은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한다. 광주항쟁이 진압된 이틀 후 글라이스틴은 광주항쟁에 대한 개인적인 평가를 담은 문서를 국무부에 보내면서 워싱턴 정가에 아래와 같이 당부하고 있는 대목은 인상적이다.


우리에게 핵심변수는 한국국민들의 진정한 반응에 달려있다. 만약 정당한 시험을 통해 대부분의 국민들이 새로 등장하는 정치구조에 적응해 살겠다면 우리도 못할 것이 없을 것으로 사료된다. 만약 국민들이 명백하게 새로운 지도부를 용인할 수 없다면 우리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변화의 실현을 모색하거나 포기해야 하는 양자택일의 기로에 놓일 것이다. 우리가 서둘러 어떤 결론을 내리지 말 것을 촉구하는 바이다. 우리의 상대는 모순되게도 법과 질서의 유지를 원하면서도 변화를 추구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글라이스틴, 알려지지 않은 역사, 202-203.)

 

즉, 미국정부는 “광주사태”가 한국사회의 정치사회 발전을 희구하는 시민사회의 초기적 저항의 형태로서, 앞으로 국민들의 정치적 각성과 중산층이 어떻게 성장하느냐에 따라 긍정적 변화의 동력으로 발전할 수 있는 역사적 계기가 될 수도 있음을 조금씩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후적 해석이긴 하지만, 글라이스틴이 그의 회고록에서 1980년 광주시민의 집단적 저항이 중산층의 성장과 함께 1987년 정권교체의 자양분이 되었다고 조심스럽게 평가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또한 1982년 이후 CIA는 각종 보고서 등에서 광주민주화운동을 이전처럼 “폭동”, “폭동행위” 등으로 지칭하지 않고, 시민소요(civil strife), 봉기(uprising), 또는 반정부시위 등과 같은 정치적인 어휘로 대체하기 시작하였으며, 특히 전두환 독재정권에 대항하는 젊은 반정부운동집단, 노동조합, 농민운동조직, 사회운동단체 등을 총칭해서 “광주세대”(Kwangju generation)라 명명하는 등 광주항쟁이 80년대 한국의 정치발전, 민주화, 인권신장을 이끌고 있는 가장 유력한 정치적/이념적 동력임을 인정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https://www.cia.gov/library/readingroom/docs/CIA-RDP89M00699R002201800006-1.pdf)


물론 이러한 인식의 변화는 광주항쟁을 폭동으로 폄하하였던 과거의 오류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광주항쟁이 1980년대 한국사회의 민주화 여정에서 차지하는 정치, 사회적 비중을 인지하고 이것을 자신들의 정책수립에 반영한 결과라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미국의 어느 정치학자가 Nunca Mas 효과 Nunca Mas는 영어로는 Never again, 즉, “다시는 이런 일이 되풀이 되어서는 않된다”는 뜻을 가진 스페인어로 아르헨티나 군사독재시절 실종된 사람들을 조사한 보고서의 제목에서 차용한 것이다. 즉, 과거의 비극을 되풀이 해서는 안된다는 역사적 교훈이 현재의 정치에 반영되는 현상을 일컫는다. 라고 불렀던 것처럼, 1987년 6월항쟁때 군병력을 동원하려던 전두환정권의 계획을 저지한 미국측의 노력도 결국은 광주학살과 같은 비극이 되풀이되는 것을 막기 위한 적극적인 개입조치의 일환으로 해석된다. 광주항쟁은 대한민국이 절차적 민주주의의 도정을 시작한 1987년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대한정책 담론 속에서 새롭게 해석되기 시작하였으며, 이런 의미에서 한국의 정치발전 여정을 둘러싼 미국의 정책 변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2. 어느 미국 선교사의 5·18 기록과 평가

1980년 당시 미국정부와 주한미대사관은 광주항쟁과 관련된 종합적인 평가를 담은 공식적인 정책/정보 보고서를 작성하거나 혹은 공개한 적은 없다. 당시로서는 외교적, 군사적으로 매우 민감한 사안인데다가 사태 직후 종합적인 견해를 피력할만한 신빙성 높은 현지정보를 체계적으로 수집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던 중 미국대사관은 1980년 6월 10일, 광주에 거주하는 미국인 선교사가 작성한 “5·18사태의 요약된 회고”(Abbreviated Retrospect of the May Eighteenth Incident at Kwangju, Korea)라는 제목의 일지 형식의 문서를 입수하여 국무부에 기밀전문 형식으로 보냈다. “광주폭동에 대한 거주자의 견해”(Insider’s Account of Kwangju riot)라는 제목의 이 전문은 총 10개의 섹션으로 작성되어 있는데, 광주항쟁과 관련하여 기밀해제된 수천 건의 문서 중 내용이 가장 긴 단일전문이다.( Telegram from Amembassy Seoul to SecState WashDC, Subject: Insider’s Account of Kwangju Riot, 1980.6.10. )

 

아마도 이 문서는 당시 광주에 거주했던 미국인이 자신이 겪은 경험을 영어로 기록하여 미국정부에 “공식적”으로 전달한 “최초”의 광주항쟁 기록물이며, 미국의 대한정책 수립에 직접적으로 관여하고 있었던 미국 고위관료들이 처음으로 접한 광주항쟁 기록이었을 것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이제까지 자신들이 평가하던 “광주사태”와는 여러 가지로 상반된 견해를 담은 이 일지를 미국대사관이 본국으로 타전하면서, “지금까지 우리가 본 보고서 중 가장 균형잡힌 광주사태 기록이자 분석”(the most balanced record and analysis of incident we have seen so far)라는 평가를 달고 신중하게 다루어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는 점이다. 급진세력에 의한 “폭동”과 “무정부사태” 정도로 인식되던 “광주사태”를 현지 목격자의 증언과 사실에 기초하여 객관적으로 재평가할 필요성이 있음을 미국정부 당국자가 처음으로 인정하는 대목이라는 점에서 시사해주는 바가 큰 대목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 문서는 작성자의 신분이 주는 신뢰에 힘입어 국무부 및 정가의 관련자들 사이에서 많이 회람되었을 것이고, 현지의 직접정보가 차단되어 가공된 정보만 접했던 정책입안자 및 분석가들 사이에는 최초의 “현장기록”이자 원자료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이후 광주항쟁에 대한 정책당국자들의 인식 형성 및 전환에 많은 기여를 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 일지를 정확히 누가 작성했는지는 미국정부는 밝히지 않고 있다. 미국대사관이 요청해서 작성한 것인지, 아니면 스스로 작성해서 대사관측에 건넨 것인지도 알 수 없다. 원래 전문에는 작성자의 이름이 포함되어 있으나, 정보공개법(Freedom of Information Act)에 의해 공개되면서 작성자의 이름과 몇몇 사람의 실명이 삭제된 상태로 제공되었기 때문에 작성자의 신분을 현재로서는 알 도리가 없다. 몇몇 국내 전문가들에 의하면 당시 광주기독병원 원목을 지내다가 최근에 서거한 헌트리(한국명 허철선) 목사가 아니겠느냐 추측도 있으나 현재까지는 확인된 바는 없다.


이 일지는 외국인이라는 국외자의 신분으로 정치적 견해를 전혀 드러내지 않고 사태를 최대한 객관적으로 기술하였으며, 무엇보다도 당시에 떠돌던 5·18 관련 각종 유언비어와 왜곡을 바로 잡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많이 발견된다는 점에서 가치가 큰 기록물이라고 하겠다. 이 일지가 담고 있는 내용의 의의는 대체로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첫째, 5·18사태는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폭력에 의해 발생했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시민들의 “폭동”사태는 전혀 없었을 뿐만 아니라, 공수부대가 물러간 뒤에는 광주는 매우 질서정연하고 안정된 공동체적 분위기에 있었음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이 일지는 당시의 광주 분위기를 아래와 같이 기술하고 있다.


“우리는 공수부대원들이 학생들을 공격하기 전에는 폭력이나 폭동과 같은 시위를 전혀 목격하지 못했다. 또한, 군인과 경찰이 도시에서 철수한 후에도 시민들에 의한 폭동을 전혀 보지 못했다. 우리의 추측에 의하면, 여기저기서 국지적 민간인에 의한 폭력사태는 있었겠지만, 이에 대한 확실한 근거는 없다. 확실한 것은, 군인들이 시위대를 진압하던 때를 제외한다면, 미국의 도시폭동(예를 들어 마이애미 폭동)과 같은 무분별한 파괴나 약탈행위는 없었다는 점이다.”


“수요일 아침, 젊은 남성들과 여성들은 온갖 구호로 칠해진 트럭, 버스, 그리고 군경 차량들에 탑승한 채 거리를 활보했다. 그들이 지나가자 시민들 남녀노소 모두 환호를 보냈다. 나는 두 번이나 학생들에게 막대기 혹은 곤봉을 모아서 쥐어 주는 여성들을 목격했다. 나중에는 학생들에게 빵, 그리고 탄산음료를 주는 사람들도 나타났다(술을 주거나 술에 취한 학생들은 보지 못했다.). 학생들과 시민들은 매우 흥분된 상태이었으며, 일상적인 규칙에서 벗어나 있었다. 몇 자루의 총기도 있었지만 전투 전날의 분위기라기 보다는 지역 스포츠팀의 중요 경기 전날같은 분위기였다.”


둘째, 5·18이 공산주의자들의 사주에 의해 또는 급진적 좌익사상을 가지고 있는 세력들에 의해 발생했다는 유언비어를 불식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일지는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5·18사태는 공산주의 세력의 침투에 의한 것도 아니고 공산주의 사상에 의해 오염되거나 영향을 받지 않았다. 이는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놀랍지는 않은데, 우리가 듣기로 당시 광주에 진입한 군인들은 공산주의 세력과 싸우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고 한다. 군인들의 이러한 오해는 정말 비극적인 사태이다. 여기서 놀라운 점은 군인들이 공산주의 세력과 전투를 벌이고 있다고 생각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도청진압 당시 사상자의 수는 의외로 적었다는 점이다.”


셋째, 광주시민들은 민주주의나 정치발전 등과 같은 거창한 가치보다는 국가폭력에 대한 저항, 공동체적 연대, 평화 등과 같은 보편적이면서 인도주의적 가치를 중심으로 결속하였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5·18사태”는 일부 학생들과 재야운동권의 폭력사태가 아니라, 시민 전체가 하나가 된 공동체적 저항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관점은 이 일지의 기록자가 “5·18사태”를 종합적으로 평가하는 마지막 대목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이 일지는 아래와 같이 정리하고 있다.


1. 광주는 폭동에 찌든 도시가 절대 아니었다. 폭동행위는 24시간 미만 동안 매우 제한된 공간에서 시민들의 분노가 표출되면서 진행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 동안에도 도시는 혼란스럽지 않았고 광주 시민들은 ‘폭도’들에 의해 위협을 받지 않았다. 이 짧은 기간 이외에는 도시는 평정을 유지했고, 시민들은 거리 안팎에서 매우 안전하게 생활했다.


2. 광주는 학생 또는 반체제 인사들에 의해 위험스럽게 점령당한 게 아니었다. 광주는 위기 아래에 시민들이 하나로 뭉친 도시였다. 이 위기는 도시 밖에서 온 것이고, 집단이 위기에 처하면 결집력이 강화되듯이 광주도 그런 과정을 밟았을 뿐이다. 시민들은 경찰과 진압기동대에게도 온정을 베풀었고, 그들이 광주시민들을 적대적으로 대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광주시민의 적대심은 야만적으로 행동한 공수부대와 중앙정부를 향했었다.


3. 광주시민의 분노의 중심에 있었던 것은 시민권, 인권, 민주주의의 발전과 같은 가치가 아니었다. 이러한 가치를 추구하는 학생운동이 사태를 촉발시킨 직접적인 원인이었고, 또한 많은 시민들은 이러한 문제들에 의해 깊게 고민하곤 했다. 그러나 광주사태는 이러한 가치들을 지키기 위해, 혹은 이러한 문제들 때문에 발생한 게 아니다. 광주사태는 광주 시민들을 향한 야만적 행위 때문에 발생했으며, 이러한 야만적 행위를 눈감고 그냥 두어서는 안된다는 의지의 표출이었다.


4. 이 기간 동안에 발생했던 악행들 중 성적인 행위나 여성들을 표적으로 한 가학적인 폭력은 거의 없었다. 이러한 행위들에 대한 끔찍한 소문들은 많았지만, 여성들에 대한 성폭력에 관련된 피해자의 증언은 설득력이 없다.

 

5. 광주사태가 안겨준 가장 놀라운 점은 이 기간 동안 쌍방 모두 기적적이고 비범한 수준의 자제력을 보여줬다는 것이었다. 정부와 계엄군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 여부와 관계없이, 분명한 사실은 공수부대가 광주에서 철수한 이후 광주에서 군인과 한국 정부는 그들의 과거 행위들과는 상반된 자제력을 보여주었다. 마찬가지로, 광주시민들이 보여준 자제력과 평정심 또한 놀라울 따름이다.


이 일지가 광주항쟁의 진상과 성격 그리고 그 의의를 정확하게 포괄적으로 기술하고 있다고는 볼 수 없다. 공수부대의 과잉집압과 무자비한 폭력을 제외하면 군인들과 전투경찰들이 대체로 자제력을 발휘하고 있었다는 대목은 다시 점검해봐야 할 대목이기도 하다. (비공수부대 군인들의 진압방식에 대한 이러한 평가는 공수부대의 폭력성을 상대적으로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판단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나아가 광주항쟁이 민주주의와 같은 정치적 목적보다는 국가폭력에 대한 원초적 저항에서 시작되었다는 평가 역시 광주항쟁의 정치적 동력을 다소 소극적으로 평가한 부분으로 볼 수도 있다. (물로 이 대목도 기록자가 외국인이고,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을 수도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해되는 부분이다.) 그러나, 광주항쟁을 급진학생운동세력과 좌익분자들의 폭동사태로 폄훼하던 당시의 왜곡된 시각을 정면으로 부인하고 교정하려고 노력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될 자료임에는 분명하다. 무엇보다도 먼저, 이 기록의 가장 큰 가치는 이러한 노력이 광주항쟁에 대해 왜곡된 시각을 가진 미국의 정책당국자들과 워싱턴 정가에 “최초”로 전달된 “공식” 영어 문건이라는 점이다.

 

3. 선교사의 5·18일지 원문 번역

번역문 중 […] 표시는 원문의 제공자인 미국정부가 삭제한 부분이다. 밝혀서는 곤란한 실명이나 기관 그리고 보안상 공개가 미루어진 단락은 삭제되었다. 문맥과 표현이 어색하더라도 수정하지 않고 원문에 충실하게 직역했으며, 번역문 중 고딕체로 강조된 부분은 중요한 내용이라고 판단해서 역자가 강조한 것이다.

 

“5·18사태의 요약된 회고”

이 문서는 미국대사 마크 리퍼트가 5·18재단에 기증한 5·18관련문서목록에 일부 첨부되어 있으나, 원문 전체는 광주광역시가 1997년에 편찬한 5·18광주민주화운동자료총서 제9권에 실려있다.

 

5월 18일 이전:

1980년 봄, 광주의 대학 캠퍼스들은 여러 이유들 때문에 극심한 불안을 겪고 있었다. 심리적인 연결고리 혹은 직접적인 인과 관계의 존재는 불분명 하지만, 대학 내의 이러한 불안은 반정부 활동과 연관되어 있었다.

5월 15일 목요일, 학생들은 대규모의 반정부 시위를 벌였다. 행진을 하며 노래를 부르고, 구호를 외치고, 저녁에는 횃불을 밝혔다. 유신헌법, 그리고 장기간 지속된 계엄령 폐지를 요구하는 시위였다. 매달 15일 정기적으로 실시되는 민방공훈련은 이 날 취소되었다. 전경들은 광주 시내 곳곳에 배치되었지만 적극적으로 시위를 진압하지 않고 각자의 위치에서 소극적으로 통제하는 수준이었다.


5월 16일 금요일, 광주 시내의 일부가 시위진압경찰들에 의해 통제되었다. 저녁에는 또 계엄령과 전두환을 비판하는 구호, 노래와 함께 횃불시위가 열렸다. (한국어를 하는 어느 목격자에 의하면 시위대는 ‘내게 강 같은 평화’와 같은 복음성가를 가사를 바꾸어 시위용으로 부르곤 했다고 한다.) 이 때도 경찰은 별 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시위는 자정 즈음에 종료되었다.


당시의 광주사태와 관련이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광주에서 대전으로 가려고 했던 선교사들은 버스표를 구할 수 없었다. 선교사들은 모든 버스가 군인들을 대전으로 이동시키는 데 사용되기 때문에 그렇다는 답변을 들었다고 한다. 토요일에 기차로 이동하던 선교사들은 그 열차에 다수의 군인들이 함께 타고 있다는 것을 목격했다. 이 군인들은 열차 안에서 매우 야만적으로 굴었으며, 심지어 몇몇 민간인 탑승객들은 물리적인 위협을 받았고, 군인들 사이에서는 피를 보이기도 했다.


토요일, 광주는 매우 고요했다. 그러나 그 날, 계엄령의 연장과 많은 대학들의 휴교가 선언되었으며 5월 18일 일요일 자정에 효력이 발생하기로 되어있었다.

광주 선교사들은 5월 18일(일요일)에 어떤 사건들이 어떻게 언제 발생했는지 정확히 알지는 못한다. 그 날 아침은 어느 때와 같이 광주는 조용했다. 하지만 정오 즈음에 교회에서 출입하던 몇몇 선교사들은 물리적 충돌의 흔적들을 발견했다. 어느 부인, […], 아이들, 그리고 미국인 손님들은 충돌의 흔적들은 발견하지 못했으나 많은 양의 최루탄 냄새를 맡았다고 말했다. 당시 최루탄은 대형 사건 외에는 자주 사용되지 않았다. 그녀의 남편은 다른 장소에서 많은 도로들이 통제된 것을 목격했으며 최루탄이 사용된 흔적들을 보았다.


일요일에 공수부대가 시내에서 목격되기 시작했는데 부대의 최초 출현 시간은 불분명하다. 몇몇 목격자들은 오전 9시라고 주장하지만 정오에 처음 봤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일요일 오후, 공수부대원들이 무차별적으로 젊은 남성들을 때리기 시작했다. 이는 […]가 직접 목격했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목격자들이 본 바에 의하면 군인들이 행사한 폭력의 강도는 매우 심각했다고 한다.


[한단락 삭제]


선교사들은 5·18사태 기간 중 시위진압경찰들이 민간인들을 향해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목격하지 못했다. 시위진압경찰들은 자신들의 위치를 고수할 뿐이며, 공수부대원들이 민간인들에게 폭력을 행사했다. 나중에는 경찰 한명이 군인의 폭행을 막으려다가 목숨을 잃었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증거는 없다. […]가 사거리에서 교통경찰과 공수부대원 간에 시비가 붙은 것을 목격했다. 군인은 택시를 타고 있던 어느 젊은 여성을 내리게 하려고 했고 교통경찰은 그녀를 그냥 보내주려고 했다. (이를 목격한 선교사는 일정 때문에 자리를 떠야 해서 이 사건의 결말은 보지 못했다. 군인은 그냥 민간인들에게 겁을 주려고 이렇게 행동한 것일 수도 있었다. 이 당시에 아직 여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성폭력 소식은 없었고, 단지 이 선교사가 목격한 사건 뿐이었다.)

월요일에 들려온 소식들에 의하면 폭력사태는 일요일 저녁부터 도시 전역으로 퍼졌다고 한다. 일요일 늦은 오후, […]는 “통상적인 폭력” – 곤봉을 사용한 가격, 쓰러진 남성들을 발로 차는 행위들 –을 목격했다. (광주 관광 호텔의 창문에서 사태를 봤다.)

6시반 즈음에 8시 통금이 선언되었지만 곧 이어 9시로 변경되었다.

이 모든 것이 진행되는 동안, 본인은 아침에 시골로 갔다가 이른 오후 다시 돌아왔고 저녁에 시내의 교회로 갔다. (통금 때문에 평소보다 조금 더 일찍 갔다.) 이 동안 평소와 다른 점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으나, 때와 장소에 따라 본 것에 큰 차이가 있었다.


5월 19일 월요일:

물론 일요일에도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이 사태의 심각한 폭력적인 사건들은 대부분 월요일에 발생했다.

본인의 가족들은 다행스럽게도 이 혼란스러운 사태에는 휘말리지는 않았다. [문장삭제] (본인이 작성한 완전한 기록에는 세부사항들과 참조 사항들이 있다.)

월요일 아침에 심각한 수준의 폭력에 대한 소식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폭동 수준의 사건들도 월요일 오후에 접수되기 시작하였다. 미국문화원(USIS) 소속의 데이비드 밀러(David Miller)가 정부 건물에 대한 방화 시도(시도들?)가 있었다고 알려줬다.

소규모 저항 운동들이 목격되기 시작했다.


[…]가 처음으로 군인들의 폭력을 처음으로 직접 목격한 것은 일요일 오후였다. 이날 그는 한 민간인이 세 명의 군인들에게 구타를 당하고, 이를 보고 있던 다른 사람들이 군인들에게 돌을 던지는 장면을 목격했다. 군인 두 명은 돌을 던지던 사람들을 추격하기 시작했고 (그들을 붙잡지는 못했다) 나머지 군인 한 명은 계속해서 민간인을 구타했다. 월요일에도 군인들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들이 있었다.

월요일부터 공수부대원들이 가정집들을 돌아다니며 젊은 남성들을 수색하였다. 군인들은 시내 버스들을 멈춰 세웠으며, 젊은 남성들을 끌어 내린 뒤 그들을 구타했다. 여러 공공 장소와 식당 등에서도 같은 일들이 일어났다. 군인들이 가정집에 실제로 침입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광주 시민들은 그렇다고 증언했지만 우리는 확실한 사례를 들어보지 못했다.)


한국인 목사 한명은 (필요하다면 이름을 공개할 수도 있다.) 공수부대원이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것을 정확하게 들었다고 했다. 또한, 그들이 ‘쓸모 없는 전라도 녀석들’을 죽이겠다고 말을 했다고 증언했다. 또 다른 목격자는 공수부대원들이, 대전으로 가는 기차 내에서 선교사들이 봤을 때와 유사하게, 완전히 자기통제력을 잃고 행동하는 것을 봤다 – 조선대학교를 지키고 있던 군인들은 옷차림이 매우 헝클어져 있었고, 술에 취해 있는게 분명했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달라고 소리쳤다. (군인들을 일부러 굶겼다는 소문이 있다. 술 또는 마약을 지급해서 군인들이 더 야만적으로 행동하도록 유도했다는 말도 있다.)

옷이 거의 벗겨지거나 속옷만 입고 있는 여성들을 봤다는 증언들은 신뢰성이 떨어졌으며, […]에 의해서도 정확히 입증된 적이 없다.


YWCA와 가톨릭 센터 둘 다 군인들에 의해서 매우 폭력적으로 수색 당했다. 군인들의 강압적인 수색은 단지 숨어있는 사람들을 찾는데 목적이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월요일 오후, […]은 젊은 남성들이 붙잡혀 가는 것을 목격했고, 체포된 남성들이 계속 구타를 당하는 것을 봤다.

일요일에 이어서 월요일에도 군인들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들이 있었고, […]는 월요일 아침에 민간인을 구타하는 군인들에게 어떤 사람들이 매달리며 말리는 장면을 목격했다. (아마도 구타를 당하고 있는 남성의 어머니, 여동생, 그리고 또 다른 가족인 것 같았다.)


평화봉사단은 이 당시에 ‘비폭력적 개입’을 통해 미국인들의 위상을 높이는 데에 많은 기여를 했다. 구타당하는 민간인을 목격하면 평화봉사단 단원들이 달려가서 그들을 껴안아서 보호하곤 했다. 이런 경우 군인들은 곧바로 다른 대상을 찾아내서 계속 폭력을 행사했다. 평화봉사단 단원들은 또 다시 표적이 된 민간인에게 달려가서 같은 방식으로 보호했다.


평화봉사단 단원들의 이러한 행동들은 광주 시민들의 지지를 이끌어냈고 광주시민들이 미국을 호의적으로 대하는 데 기여했다는 게 선교사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심각한 위험이 닥쳐올지도 모르는 상황 속에서 광주 시민들을 위해 봉사했고, 그들을 지켜본 사람들은 미국인들이 그들을 진심으로 위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평화봉사단원들은 군인들을 향한 반감을 갖기 보다는, 우리 모두가 함께 처한 곤경을 이해하려고 애쓰면서 광주시민들이 처한 상황에 공감을 보냈다. 선교사들은 신도들에 대한 애정과 일종의 책임감 때문에 광주를 떠날 수 없었지만, 평화봉사단원들은 광주를 떠나라는 상부의 지시를 어기고, 자신들의 임무와는 무관하게 광주에 남아서 시민들을 위해 봉사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평화봉사단본부가 광주에서 일어나고 있던 상황들을 목격을 했다면 단원들의 이러한 행동들을 적극 지지했을 것이다. 미국인으로서, 우리는 평화봉사단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우리는 공수부대원들이 학생들을 공격하기 전에는 폭력이나 폭동과 같은 시위를 전혀 목격하지 못했다. 또한, 군인과 경찰이 도시에서 철수한 후에도 시민들에 의한 폭동을 전혀 보지 못했다. 우리의 추측에 의하면, 여기저기서 국지적 민간인에 의한 폭력사태는 있었겠지만, 이에 대한 확실한 근거는 없다. 확실한 것은, 군인들이 시위대를 진압하던 때를 제외한다면, 미국의 도시폭동(예를 들어 마이애미 폭동과 같은 공교롭게도 1980년 5월 18일에 미국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에서는 대규모 인종폭동이 일어났다. 일부 미국 언론에서는 광주사건을 마이애미 인종폭동과 비교하기도 하였다. (역자주))과 같은 무분별한 파괴나 약탈행위는 없었다는 점이다.

 

폭력사태는 월요일에 시작되었으며, 군인들(경찰을 포함하여)이 도시에서 철수할 때까지 계속됐다.

월요일에 많은 차량들과 버스들이 불에 탔다.

일반 시민들이 정확히 언제 학생들과 합세했는지는 불확실하다. 아마도 월요일 밤부터 그랬던 것 같은데, 화요일 이전인 것은 확실하다.

소식의 진원지를 알 수는 없으나, 우리가 접한 소식에 의하면 공수부대원들은 월요일 이후부터는 광주 시내에 머무르지는 않았다. 월요일 자정 즈음에 철수되어서 다른 부대 소속 군인들에 의해 대체된 것으로 알고 있다. (전라북도 부대 소속 군인들?)


5월 20일 화요일:

화요일 아침에 광주 시내에는 공수부대 소속 군인들은 보이지 않았고, 대신에 전라북도 소속 군인들에 의해 대체되었다. (며칠 후, […]는 시내에서 군복을 입지 않은 공수 부대원들 두 명과 마주쳤다. 그들은 매우 헝클어진 상태였고 아마도 길을 잃고 겁에 질려 있었던 것 같았다. 그는 군인들과 잠시 몸싸움을 벌였고 그 장소를 빠져나왔다. 아마도 부대가 철수할 때에 본 부대와 합류하지 못하고 도시에 남은 군인들이었던 것 같았다.)

화요일 아침은 매우 고요했다. […]은 돈을 출금하러 은행에 갔는데 젊은 남성들(보통이라면 군인들의 표적이었을 나이)이 걱정 없이 거리를 활보하는 것을 봤다.

월요일 저녁부터 시작된 가택 수색은 화요일 저녁에 실시될 대규모 가택 수색 및 납치/구속 계획의 전조였다는 소문이 화요일에 퍼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근거 없는 소문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하지만 당시에는 많은 사람들이 이를 믿었다. 또한 공수 부대원들이 여성들의 가슴을 도려내서 총칼에 꽂고 돌아다닌다는 소문도 퍼졌다. 하지만 우리는 여성들에 대한 가혹 행위가 행해졌다는 근거 있는 소식을 듣지 못했고 대다수의 소문들은 여성들보다는 남성들에 대한 가혹 행위에 대한 것이었다. 어떤 게 진실이었는지 우리 선교사들은 잘 알지 못한다.


화요일 저녁, 당시 통금이었던 9시 이후까지 대규모 시위가 있었다. 이 때에 우리는 많은 총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수요일 아침, 군인들과 경찰들은 광주 시내에서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계엄군 홍보물(5월 21일 수요일에 발행되었던)에 의하면 화요일 저녁, 군경은 총 10명의 사상자가 있었고(사망 혹은 부상) 공공 시설들, 경찰서, 그리고 3채의 방송국 건물들이 불에 타거나 파괴되었다.

군인들이 화요일에 도시에서 전부 철수한 것은 아니었고, 군경과 시민들 사이의 마찰은 수요일에도 계속되었다.

한국인 영어교사가 외국인 특파원에게 쓴 편지에 의하면 MBC 방송국 건물이 실수로 불에 붙었으며, 학생들은 이를 소화하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이 주장에 대한 근거는 아직 찾지 못했다.

“VOC”라고 불리는 지역신문 건물이 군인들에 의해 파괴되었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이 또한 아직 근거가 없다.


5월 21 수요일:

우리는 직접 목격하지는 않았지만 총성과 함깨 여기저기 연기가 피어 오르는 것으로 미루어, 수요일까지 군인과 시민간 대치는 계속되었다. […]은 몇몇 사람들을 시골까지 데려주고 복귀했다. 오가는 동안 그는 불타는 많은 차량들을 목격했고 무장한 시민들과 접촉이 여러 번 있었지만 군인과 경찰이 주둔하고 있는 지역(그가 차량으로 통행할 수 있었던 지역과 나중에 사진을 찍으러 간 곳에 한정해서)에는 무장한 시민들은 없었다.

수요일 아침 우리들은 매우 놀랐다. 군인들과 경찰들이 사라졌고, 그보다 더 놀랍게도 모든 시민들이 학생들에게 환호를 보냈기 때문이다. 몇몇 조용하거나 소심한 시민들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학생 시위대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보냈다.


이 때부터 5월 18일 사건은 학생들에게 국한된 게 아니라 광주시민의 일이 된 것이 분명하다. 본인은 이 사실을 뒤늦게 깨닫게 된 사람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이 사실은 논쟁의 여지가 없다.

사설 부문 – 넘어가도 무관


광주에서 일어난 이 사태는 자유 시민들이 너무 많은 압박을 받을 경우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에 대한 표본이었다. 평소에는 법을 준수하는 시민들이 극한 상황에서는 그 어떤 법 혹은 정책에도 의존하지 않는 폭력적인 반항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사건은 보스톤 차 사건에 비유할 만 하다고 생각한다 – 시민들이 억압받는 것을 더 이상 참지 못 할 때에 나타나는 초법적, 격정적, 파괴적, 비계산적 행동인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도시가 이성을 찾아가는 일련의 과정을 볼 때에 더 설득력있게 다가온다. 아마도 광주사건에 관련된 당시의 미국 신문 사설 또는 칼럼을 인용한 것으로 판단되는데, 어떤 신문인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역자주)

 

수요일 아침, 젊은 남성들과 여성들은 온갖 구호로 칠해진 트럭, 버스, 그리고 군경 차량들에 탑승한 채 거리를 활보했다. 그들이 지나가자 시민들 남녀노소 모두 환호를 보냈다. 나는 두 번이나 학생들에게 막대기 혹은 곤봉을 모아서 쥐어 주는 여성들을 목격했다. 나중에는 학생들에게 빵, 그리고 탄산음료를 주는 사람들도 나타났다(술을 주거나 술에 취한 학생들은 보지 못했다.). 학생들과 시민들은 매우 흥분된 상태이었으며, 일상적인 규칙에서 벗어나 있었다. 몇 자루의 총기도 있었지만 전투 전날의 분위기라기 보다는 지역 스포츠팀의 중요 경기 전날같은 분위기였다.


곳곳에서 싸움은 계속되었다. 정오 즈음에 […]은 연기를 봤고, 이를 더 자세히 관찰하기 위해 잘 보이는 곳으로 장소를 옮겼다. [… ]은 이 연기가 불타는 세무서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만약에 이 건물이 군경과의 대치과정에서 파괴된 것이 아니라 무차별적인 파괴 행위에 의해 불에 탄 것이라면 이 최근 시점에서 목격된 유일한 무차별적 폭동의 근거가 될 것이다. 아무튼 이 건물은 철저하게 파괴되었으며 근처에 있던 다른 관련 건물들, 그리고 […]가 소유한 주택과 식당 또한 같은 운명을 맞이했다. 그의 건물은 세무서와 인접해있었기 때문에 불이 번지는 것을 피하지 못했다.

이 사건 조금 이전에 […]은 가톨릭 센터 앞에 ‘수많은 시신’가 있다는 말을 들었으며, 이를 촬영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차량을 이용해 그곳까지 갈 수가 없었고, 차량을 내버려둔 채 갈 의향은 없었다. 이런 소극적인 태도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매우 언짢게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 실제로 많은 수의 시체를 목격했다.)


수요일 정오부터 사상자가 속출하기 시작했다. 그 이전에 다치거나 죽은 사람들은 도시가 다시 점령되고 사망자들이 땅에 묻힌 이후에도 대부분 제대로 기록되지 못했다.

많은 사상자들은 어처구니 없는 비극의 소산이었다. 우리는 이와 관련된 몇 가지의 이야기들을 알고 있다. 그러나 공수 부대가 철수한 이후 무차별적인 폭력 행위에 대한 근거는 없다. 이는 주둔 군인들이 대체되었기 때문이거나, 또는 사태 분위기가 폭동사태에서 대치상태로 전환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광주기독병원에서 보고된 첫 사상자는 등에 총검에 찔린 한 남성이었는데, 그는 자기 자녀의 행방을 찾다가 봉변을 당했다. 하지만 상황을 고려했을 때에 가해자 군인이 무고한 시민인 것을 안 채 칼을 휘둘렀는지의 여부는 불분명하다. 만약에 이 남성이 알려준 것처럼 정오쯤 관광호텔 근처에서 상처를 입은 것이라면, 그곳에 주둔한 군인들은 매우 공격적이고 위험한 시위대와 맞닥뜨리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헬리콥터가 비행하면서 시위대에게 발포를 하겠다는 위협을 하며 해산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실제로 실탄이 발포되었을 때에 시민들은 엄청난 분노를 표출했다.


수요일 오후 3시에서 4시 사이에 사망자와 부상자들이 속출했다. 4시까지 광주기독병원에 호송된 사상자들은 10명의 사망자와 50명의 부상자들이었다. (그러나 목요일 정오 즈음까지 병원에 호송된 사망자들은 13명 혹은 15명 정도였다. 부상자들은 물론 더 많이 속출했다.)

수요일 저녁에는 가택수색 및 체포, 그리고 다른 물리적 위협에 대한 소문을 듣고 안전을 위해 많은 사람들이 예배당으로 몰려왔다. 대부분은 젊은 청년들이었다. 내 집에 피신한 사람은 없었다.


[내용삭제 ]


수요일 일몰후 총성이 더 빈번하게 들리기 시작했는데, 대부분 매우 근접한 곳에서 들려왔다.

수요일 밤에 도시에 다시 군인들이 진주할 것이라는 소문이 있었으나, 밤이 깊어지면서 정적이 찾아왔다.


[내용삭제 ]


성조기를 달고 ‘외국인 소유 차량’이라는 표시를 한 차량 두 대로 그들은 시민들의 엄호를 받으며 우회로를 이용해서 송정리로 이동했다. 송정리는 당시 ‘시민들의 점령’ 하에 있었고 기차 운행은 중단된 상태이었기 때문에 되돌아 와서 고속도로를 타고 군인들에 의해 저지를 받을 때까지 북쪽으로 이동했다. 군인들은 조금만 더 가면 있는 기차역에서는 기차가 운행한다고 말해주었는데, 사실이었다. 그곳에서 일행을 떠나 보낸 후 차량 두 대는 광주로 복귀했다. 가는 도중에 신설된 검문소에서 저지당했으며, 도시가 공격을 받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이후에 검문소의 허락 하 도시에 입장했을 때에 이 말은 사실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도시 외곽에서 무장한 시민들을 만나서 그들의 엄호 하에 도시를 떠났을 때와는 다른 길로 집으로 복귀했는데, 돌아오는 도중에 별다른 사건은 없었다.


(광주로 돌아오는 길에서 우리는 주민들이 무장한 시민들이 탑승한 차량에 식량과 음료를 보급해주는 장면을 봤다. 버스에 타고있던 무장한 시민 한 사람이 […]에게 빵을 하나 던져줬지만 놓치고 말았다.)

이 와중에 본인은 두 가지 소문을 들었다. 하나는 모든 선교사들이 도시를 떠났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미국 대사관 간부들이 광주에 왔다는 것이었다. 이런 헛소문을 듣고 역시 소문은 믿을 게 못된다고 생각했다.

목요일 밤에 또다시 도시가 군인들에 의해 점령될 것이라는 소문이 들려왔다. 저녁 11시에서 12시반까지 본인의 가족과 […]은 소총을 비롯한 중화기가 발사되는 소리를 계속 들었다. 서쪽의 송정리쪽에 위치한 군 부대에서 들리는 것이 분명했으며 남쪽으로 포위를 하듯이 전진하는 소리처럼 들렸고, 나중에 늦은 밤에는 도청 근처에서 총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아침에, 적어도 우리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이러한 총성의 흔적들은 찾기 힘들었다.


금요일에서 월요일까지, 5월 23일에서 5월 26일:


금, 토, 일, 월요일의 4일 동안은 광주를 정상적인 상태로 되돌리기 위한 시민과 군인 간의 사이의 협상 및 상호자제의 시기였다.

이러한 국면 전환은 기독교 성직자들에 의해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겠으나, 우리와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는 두 교파의 목사들이 많은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하다.

[…]에 의하면 군인들은 수습대책위원회의 요청을 받아들여서 4번이나 군사활동을 중지시켰다고 한다.

밤마다 총성이 들렸다. 군인들은 시내 깊숙이 진격했다가 철수하곤 했다. 목사 대표가 직접 군인들과 접촉하여 아직 군부대의 도시 진입이 합의되지 않았기 때문에 철수할 것을 요구해서 군인들이 철수한 적이 적어도 한번은 있었다.


금요일 아침 […]의 가족은 군복을 입은 군인 두 명이 시내를 활보하는 것을 목격했으나 서로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다.

이 당시에 시민들은 질서를 잘 유지시켰으며 군부대가 다시 투입되었을 때에 충돌을 피하기 위하여 무기와 폭발물들을 수거하기 시작했다. (무기 수거는 군부대 진압에 대항하기 위해 비축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으나, 그건 사적인 견해에 불과했다.) […]가 선두에 서서 […]의 창설에 힘썼다.

대부분의 급진적인 학생들도 수습대책위원회의 결정 사항들을 거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몇몇은 새로 합류한 ‘시민위원회(Concerned Citizens’ Committee) 아마도 25일에 결성된 “민주투쟁위원회”를 가르키는 것으로 추측된다. (역자 주)

 

’ 소속 사회운동집단들과 의견을 수렴하여 좀 더 강한 요구 사항을 들고 합의하는 것이 낫다고 주장했다. 이 집단의 주장은 나중에 큰 문제가 되었다.

시민들 사이에서 합의점이 결렬되자 더 이상 시민 대표가 계엄군과 대화를 나눌 수가 없었다.

일요일 저녁에 우리는 군 활동이 일요일 밤 혹은 월요일에 재개될 것이라는 전갈을 받았다. 사전에 우리에게 통보된 바가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군인들이 약속을 어긴 것이라고 생각하고 […]은 수습대책위원회 대표들을 찾아가기로 했고, 군사행동 연기를 요구하여 약속을 받아내기로 결정하였다.

월요일 아침에 군부대가 이동하는 것을 직접 목격했고 이 전갈이 사실이었음이 확인되었다.


우리는 수습대책위원회를 만나기 위해서 길을 나섰다. 길가에는 수습대책위원회가 사용하던 것과 거의 유사한 선전지들이 붙여져 있었다. 본인이 만났던 위원회 위원은 이제는 상황이 자신의 능력 밖에 있음을 직감하는 듯 했다. 그리고 그는 시민들 사이에서 합의가 결렬된 것 때문에 이러한 상황이 초래되었다고 주장했다. 즉, 군과 시민의 합의는 이미 효력이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시내 길거리에 부착되어 있던 선전지들은 누가 봐도 제3자가 만든 것이 분명했으며, 이성적인 사람이라면 이를 무시했을 것이었다. 당시에 […]와 연락이 잠시 두절되었지만 다른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우리를 시민투쟁위원회의 회의로 안내해줬고 발언을 하지 않는 조건 하에 회의 내용을 들을 수 있었다.


사실은 정부군에 의해서 최종 기한이 통보되었고, 계엄군은 그 기한 이전에는 시내로 진격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보를 잘못 해석했거나 누군가가 다른 행동을 취한 것이 분명했다.

월요일 밤, 혹은 더 엄밀하게는 5월 27일 화요일 이른 새벽에 도시는 다시 점령되었다.

군인들은 재빠르고 효율적으로 작전을 실시했다. 이 날 우리가 들은 총성은 목요일보다 적었다.

도시의 재점령이 이렇게 큰 사상자 없이 진행될 수 있었던 것은 시민들이 저항에 합세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우리는 생각한다. 아마도 실질적으로 도시 점령에 저항한 집단은 앞서 기술한 급진 집단과 이에 합세한 몇몇의 고등학생들이었을 것이다.

금요일에서 월요일 사이의 기간은 미국인들에게 광주에서 떠나라는 통보가 있었던 때였다. 타임(Time) 매거진은 공군기지에 ‘몇몇의 선교사’들이 피난을 왔다고 전했는데, 이는 사실이다. 말일성도교회 소속의 젊은 선교사들은 실제로 광주를 떠났다. 이 외에 광주를 떠난 다른 선교사들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

[…] 지역 사람들은 우리들의 존재를 크게 반겼었다. 우리들은 이들을 두고 떠날 수가 없었다. 그 때 만약 모른 채 하고 우리가 광주를 떠났었다면 우리가 나중에 여기로 다시 돌아올 수는 발판을 잃어버렸을 것이다.


5월 27일 화요일에서 6월 4일 수요일까지:

 

5월 27일 해가 뜰 때 즈음에 도시는 다시 점령당했다. 라디오에서는 시민들에게 거리에 나오지 말라는 경고 방송이 나왔다. 모두가 이 말에 따른 것은 아니었지만 아무도 다치거나 위협을 받지는 않았다.

점령작전은 시민들에 대한 반격보다는 무장해제를 거부하거나 경찰과 군인들을 향해 직접적으로 저항하는 사람들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여섯 명이 우리 교회에서 연행되었으며, 곧바로 구속되었다. 군인들에게 총살을 당할 수도 있는 상황인데 연행된 것은 천만다행이다.


나중에 알았지만, 당시에 우리는 YWCA에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사건 때문에 큰 충격을 받았다. 당시 YWCA에서는 통금시간을 넘어서까지 늦게 기도회가 열렸고, 기도회에 참가한 여학생들은 몰래 집으로 돌아갔으나 남학생들은 계속 그곳에 남아있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남학생들은 무기를 반납하지 않고 총을 소지하고 있었다. 이 때에 사망자는 두 명 뿐이었다. 한 명은 YWCA 직원, 그리고 한 명은 남아있던 남학생들 중 한 명이었다.


5·18사태는 공산주의 세력의 침투에 의한 것도 아니고 공산주의 사상에 의해 오염되거나 영향을 받지 않았다. 이는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놀랍지는 않은데, 우리가 듣기로 당시 광주에 진입한 군인들은 공산주의 세력과 싸우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고 한다. 군인들의 이러한 오해는 정말 비극적인 사태이다. 여기서 놀라운 점은 군인들이 공산주의 세력과 전투를 벌이고 있다고 생각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도청진압 당시 사상자의 수는 의외로 적었다는 점이다.


광주시는 교외 지역에 위치한 공동묘지에 시신들을 수습할 장소를 제공했으며, 유족들 역시 딱히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트럭이 관을 운반했고 무료로 운송되었던 버스에 유족들이 타고 이동했다. 시소속 공동묘지 관리들은 묘역들을 준비했고 사망자들의 매장이 완료된 후 뒤처리까지 도와줬다. 우리는 신학대학생 한 명의 장례식에 참가했었다 5월 27일 도청을 지키던 신학대학생 “문용동” 씨가 군의 공격으로 사망했는데, 아마 이 분을 가르키는 것으로 추정된다. (역자주)

 

. 그는 주변에서 인정할 정도로 모범적인 학생이었고 폭발물을 안전하게 지키다가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다. 많은 장례식들이 동시에 진행되었기 때문에 육체적, 정신적으로 자리를 지키기가 매우 힘들었다.

5·18사태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시민들 사이에 복수심이 높아지고 있음을 느끼고 있다. 시민에들에게 온정적인 소식통에 의하면 시당국이 합의를 깼으며, 당초의 약속은 애시당초부터 공허한 것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약속이 정말 공허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시당국이 약속을 제대로 이행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사정이 이런데도, 시민들이 이렇게 신사적으로 대응하고 있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축약된 증언이 이 정도로 길면 얼마나 많은 것들이 생략되었는지 생각을 해 봐라. 마지막으로 한 가지 말만 더 하겠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5·18사태 만큼 한국인 친구들이 가장 자랑스럽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내가 한국인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생각들은 이 기간 동안 완전히 뒤바뀌어졌다. 그들은 의로운 일을 이룰 수 있다면 그 어떤 값도 치룰 수 있는 의지를 보여줬다. 특히, 초기의 비극적인 사태 이후에 군인들이 보여준 자제력과 당시에 떠돌던 엄청난 소문들을 듣고도 평정심을 유지한 시민들 모두 감동적이었다.


한국인 친구들에게 돌아가야 할 마땅한 칭찬에 앞서서, 나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싶다. 하나님은 당신을 믿는 수백 명, 그리고 믿지 아니하는 수천 명의 마음 속에 매일 기적을 행하시며 이 어려운 시기에 우리의 기도에 답을 해 주셨다. 이제 반드시 기억해야할 중요한 점들 몇 가지를 기술하려고 한다.


1. 광주는 폭동에 찌든 도시가 절대 아니었다. 폭동행위는 24시간 미만 동안 매우 제한된 공간에서 시민들의 분노가 표출되면서 진행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 동안에도 도시는 혼란스럽지 않았고 광주 시민들은 ‘폭도’들에 의해 위협을 받지 않았다. 이 짧은 기간 이외에는 도시는 평정을 유지했고, 시민들은 거리 안팎에서 매우 안전하게 생활했다.

 

2. 광주는 학생 또는 반체제 인사들에 의해 위험스럽게 점령당한 게 아니었다. 광주는 위기 아래에 시민들이 하나로 뭉친 도시였다. 이 위기는 도시 밖에서 온 것이고, 집단이 위기에 처하면 결집력이 강화되듯이 광주도 그런 과정을 밟았을 뿐이다. 시민들은 경찰과 진압기동대에게도 온정을 베풀었고, 그들이 광주시민들을 적대적으로 대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광주시민의 적대심은 야만적으로 행동한 공수부대와 중앙정부를 향했었다.

 

3. 광주시민의 분노의 중심에 있었던 것은 시민권, 인권, 민주주의의 발전과 같은 가치가 아니었다. 이러한 가치를 추구하는 학생운동이 사태를 촉발시킨 직접적인 원인이었고, 또한 많은 시민들은 이러한 문제들에 의해 깊게 고민하곤 했다. 그러나 광주사태는 이러한 가치들을 지키기 위해, 혹은 이러한 문제들 때문에 발생한 게 아니다. 광주사태는 광주 시민들을 향한 야만적 행위 때문에 발생했으며, 이러한 야만적 행위를 눈감고 그냥 두어서는 안된다는 의지의 표출이었다.

 

4. 이 기간 동안에 발생했던 악행들 중 성적인 행위나 여성들을 표적으로 한 가학적인 폭력은 거의 없었다. 이러한 행위들에 대한 끔찍한 소문들은 많았지만, 여성들에 대한 성폭력에 관련된 피해자의 증언은 설득력이 없다.

 

5. 광주사태가 안겨준 가장 놀라운 점은 이 기간 동안 쌍방 모두 기적적이고 비범한 수준의 자제력을 보여줬다는 것이었다. 정부와 계엄군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 여부와 관계없이, 분명한 사실은 공수부대가 광주에서 철수한 이후 광주에서 군인과 한국 정부는 그들의 과거 행위들과는 상반된 자제력을 보여주었다. 마찬가지로, 광주시민들이 보여준 자제력과 평정심 또한 놀라울 따름이다.


선교사들은 큰 위험에 빠진 적은 없으나 우리 조국뿐만 아니라 광주사태의 양 당사자들에게도 많은 걱정의 대상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에게 영웅심은 요구되지 않는다는 교훈을 얻었고, 하나님은 우리들이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면 안되는지 명확한 지침을 주셨다. 주님의 보살핌 하에서 우리는 두려움을 느끼지는 않았으며, 그래서 특별한 영웅심이 필요하지 않았다. 일이 조금이라도 잘못되었다면 우리들 중에서도 사망자가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웅이 되라고 요구하지는 않았음을 느끼고 있었다. 우리가 심각한 상황에 놓이기는 했으나 주님께서 우리를 보살펴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크게 우려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 글은 1980년 6월 5일에서 6일 사이에 작성되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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